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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예

[다큐극장]적에서 동반자로 한중수교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정식 국교를 수립한다는 뉴스가 전 세계 언론의 톱뉴스를 장식했다. 세계는 한중수교를 ‘탈냉전 외교의 상징’이자 ‘한국전쟁의 실질적인 종식’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은 혈맹인 북한을 뒤로하고, 한국은 같은 분단국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대만과의 단교를 하면서까지 맺게 된 수교였다.

한중수교는 10여 년 간의 양국이 조용히 준비를 해 온 결과였다. 그러나 수교를 위한 실무협상은 103일 동안 철저하게 비밀로 진행됐다. 북한과 타이완의 반대 때문이었다.

한중수교 21주년을 맞는 8월 24일, 한중수교 이전에 진행된 한국과 중국의 접촉으로부터 극비 수교협상 과정의 뒷이야기 그리고 수교 이후 다가온 변화에 이르기까지를 수교 당시의 당사자들 증언을 토대로 심층 조명한다.

◆작전명 ‘동해사업’, 극비리에 진행 된 한중수교 실무협상
한중수교는 양국의 언론은 물론, 정부 당사자들도 극히 일부만 알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 되었다. 두 나라의 혈맹이자 우방인 북한과 타이완의 반대가 워낙 극심했기 때문이었는데….

6공화국의 북방 외교로 우방이던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던 북한,  ‘하나의 중국’ 정책으로 1971년 유엔 상임이사국에서 물러난 후, 아시아에서 정식 수교국은 단 하나, 한국뿐이었던 타이완.

두 나라의 사활을 건 방해와 이를 피해 한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진행했던 한중수교 비밀 회담 뒷이야기를 살펴본다.

◆水到渠成 (수도거성: 물이 흐르면 도랑이 생긴다) - 적성국 한국과 중국, 만남에서 수교  까지
‘물이 흐르면 도랑이 생긴다(水到渠成ㆍ수도거성)’, 92년 4월 13일 리펑 총리가 이상옥 외무장관에게 한 말이다. 

두 나라 사이의 물길은 우연한 사건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수교 9년 전인 83년, 중국의 민항기 한 대가 납치되어 춘천에 불시착한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던 한국은 납치되어 온 승객들과 이들의 송환을 위해 방한한 중국 당국자들을 최대한 예우했고, 중국은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협의문에 서명을 하는데….

그 후 다양한 민간 교류와 88서울올림픽, 90베이징아시안게임을 등을 통해 한중관계는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특히 경제 교류는 급격히 증가하여 한국은 수교 전에 이미 제 3국을 통한 중개무역으로만 중국의 7대 교역국이 된다.

한국은 수교만 된다면 새로운 시장이었던 중국으로 진출할 기업들이 줄을 이었고, 중국은 천안문 사태 이후 줄어든 서구사회의 투자를 만회하기 위해 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두 나라는 국교 정상화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된다.

◆한국과 중국, 수교의 전제조건 - 북한, 타이완의 손을 놓아라
오랜 기간 탐색전 끝에 만난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수교 조건은 어찌 보면 단순했다. 중국은 한국에게 타이완과 수교를 끊지 않는 한 수교 회담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하고, 한국은 중국에게 북한과 거리를 두고 한국을 동등하게 대하라고 요구한다.

타이완과의 단교, 단 하나를 조건으로 내세운 중국. 그에 맞서 여러 가지 요구를 관철하고 싶은 한국. 두 나라 대표들의 기 싸움에서부터 수교회담 공동선언문이 나오기까지, 치열했던 회담 과정을 당시 당사자들의 증언과 중국 고위층의 회고록을 통해 재구성해 본다.

◆한중수교 21년, 성장의 동반자가 된 한국과 중국
한중수교 이후, 북한은 개방을 거부하고 핵을 선택해 고립의 길을 걷게 된다. 한국과 중국 두 나라는 수교 이후 21년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해 왔다.

중국과의 교역을 밑거름으로 IMF의 시련을 이겨 낸 한국은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성장하게 됐다. 중국은 한국의 ‘국가주도 경제 발전 모델’을 받아들여 미국과 함께 G2로서의 위치로 부상했다.

두 나라의 눈부신 발전, 그 한 축에는 낡은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실리를 추구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한 두 나라의 선택. 한중수교가 있었다.